썰
[토니바튼] Beautiful Romance
팡개
2016. 12. 1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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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작은 형편없었다.
서로의 대한 감정에 서툴러 서로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심지어는 적대하기까지 했고, 그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간신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이해했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심장으로 시작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 누구보다 가질 수 있는 게 많을 거라고 자부했다. 시작은 미약했어도, 끝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창대할 거라고.
우리 여행 갈까?
지금 상황에 무슨 여행을 가요.
지금이 가장 한가한 시기잖아. 가자.
됐어요, 바빠.
왜, 같이 가면 재밌고 좋잖아. 가자-
... 어차피 갈 생각이었나본데 혼자 가세요. 아니면 포츠 양이랑 다녀오시던가요.
허니 없으면 재미없단 말야...
... 미안한데 못 가요, 진짜.
그렇게 너는 한 달 동안 자취를 감췄다. 그 놈의 장기 임무는 뭐가 그리 자주 있는지, 둘이 같이 있으려고만 하면 훌쩍 떠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정해진 날짜인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정말 미루면 안되는 일이냐고 물어봐도 그냥 안 된다고만 하고 도통 그 내막은 알려주지를 않았으니까. 장기 임무라고 하면 거의 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 규정이지만, 사실 나는 알려고 하면 알 수는 있었다. 해킹이야 항상 해왔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진실을 알기가 싫었다. 그것이 정해진 날짜가 아니라 그가 임의로 정해서 가는 것이라거나 한다면, 그 후폭풍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혹여나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나는 두려웠다. 그가 나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회피하고 있다는 추정이 정말 사실로 다가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한동안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너의 앞에서는 활발하게 구애하고, 거절당하고, 너는 바빴고, 나는 혼자 남을 때면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자비스가 알아챘고, 내가 기억했고, 그 시간과 공간이 담아버린 안타까운 순간은, 끊임없이 기억 속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제가 왜 좋아요?'
너는 가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그런 말을 했었다. 자기의 어디가 좋은 거냐고, 당신은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라도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해주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말했다. 나는 너를 좋아해주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라서 좋은 거라고.
너는 몇 번이나 헷갈렸었던 것 같다. 항상 똑같이 애정을 주고 또 주는 내 대답과 행동에도 너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렇냐고 얼버무렸다. 애써 모른 척을 하기는 했지만 알고는 있었다.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어쩌면, 어떻게 하면 내가 널 포기하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랑은 서서히 침몰했다.
나는 깊은 심해로 떨어져 점점 사라져가는 빛줄기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내가 가라앉고 있는 그 바다가 너라는 걸 알았다는 거다. 너라는 흔적이 가득한, 추억이 가득한, 그런 바다였다. 이따금씩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위로 헤엄쳐가지만, 너의 흔적에 또다시 가라앉고마는, 그런 바다였다. 섣불리 빠져나갈수도, 깊은 곳으로 마냥 가라앉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희미한 빛줄기를 잡으려 헛손질도 해보았고, 너의 흔적을 따라서 헤엄도 쳐봤지만, 그 어디에도 너는 없었다.
우리라고 기쁘지 않았던 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단 둘이 마주앉아 사랑을 속삭인 적도 있었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며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준 적도 있었다. 뜨거운 숨소리를 공유하던 날도 있었고, 차갑기만 한 손을 잡으며 온기를 나누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다 사라져버렸다거나, 기억에서 잊히기라도 했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너는 나란 존재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몰아세우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도, 너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알아갈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은 건, 바로 너였지 않은가.
우리의 사랑은 끝이 났다.
단 한 번도 네 앞에서만큼은 네 탓을 한 적이 없었다. 나 혼자일 때만, 두려움에 떨면서, 어둠에 동화되어 울면서 네 탓을 했었다. 네가 내 옆에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울 일이 없을 텐데, 하고 말이다. 지금도 이렇게 네 탓을 하는 것 또한, 네가 내 옆에 없기 때문이다. 그 때에도 그랬다. 처음으로 딱 한 번, 네 앞에서 네 탓을 했었지만, 그 때의 너는 이미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은 너에게, 끈적한 피가 내 옷과 손에 배어도 깊게 베어진 손목을 잡고, 너를 깨우려 애쓰며 네 탓을 했었다. 내가 이렇게 우는 건 너 때문이라고.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가라앉는 것도 너 때문이라고, 지금도 네 탓을 하고 있다. 너의 흔적이 가득한, 너의 모습이 가득한 곳을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 헤엄치면서. 몸에 닿아오는 것이 차가운 게, 마지막의 너와 같았다. 아무리 애써도 깨어나지 않던 너는,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바닷물과 같았다. 내 몸 구석구석 빠진 곳 하나 없이 채워져 있는데, 도통 잡을 수가 없었다. 너란 존재는.
우리의 사랑이, 마지막 한 숨까지 내뱉어졌다.